바르셀로나.3 누군가의 가슴에 새겨진 것

로마까지는 배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아를에서 하루 정도를 지내고 이탈리아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기차도 마땅치 않았고 지중해 위에서의 음주와 끽연도 즐거울 것 같아 로마 근처의 어느 항구로 가는 표를 끊었다.

출항은 저녁 7시. 남은 시간 바르셀로나에서 무얼 할까 잠깐 고민했었다. 가우디도 좋았고, 지중해를 바라보며 즐기는 광합성도 좋았다. 이번엔 어디를 가볼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이 "캄프 누(Camp Nou)"에 간다고 하기에 옳다구나 싶어 따라 나섰다.

F.C.B
F.C.B by t_buchtele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유럽의 축구는 재미있지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진 않았다. 그럼에도 FC바르셀로나는 종목을 떠나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팀이다. 그건 이 팀이 프리메라리가가 시작된 이후 한 번도 강등되지 않은, 지구에서 가장 대단한 선수들이 뛰고 있는 팀이어서가 아니라, 한 번도 스폰서기업의 광고에 자신들의 가슴을 내주지 않았던 클럽이기 때문이고, 그 클럽이 처음으로 그들의 가슴을 내어준 기관이 유니세프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클럽, 그 이상"의 클럽이 아닐까.
 
Encouragement
Encouragement by moacirpdsp 저작자 표시

생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던지 이미 선수들은 연습 중이었다. 함께 갔던 친구들은 철망 사이로 선수들의 사진을 찍기에 바빴고, 나는 그저 구장을 어슬렁 거렸다. 이것저것 나름 볼거리들이 많았지만, 가장 큰 감동은 구장 입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수막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의 홈구장에 걸려있는 대형 현수막은 "아이들의 기아"를 말하고 있었다.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차를 타고 지나가는 어떤 선수를 바로 앞에서 보았었는데, 이제는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걸 보면 선수가 준 감동보다 현수막이 준 감동이 더 컸던 것 같다. (그 차 안에 양준혁 선수가 있었다면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ㅡㅡ;;)

Torre Agbar
Torre Agbar by stukinha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캄프 누'에 푹 빠져버린 일행과 인사를 하고, 숙소 아주머니께 들었던 벼룩시장을 찾아나섰다. Plaza Glories Catalanes. 지도도 없이 찾아가기는 조금 어려웠는데, Torre Agbar 근처를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벼룩시장 비슷한 곳을 발견했다.

Els Encants
Els Encants by SunToad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벼룩시장이 주는 재미는 여기나 거기나 비슷했다. 누군가의 추억이 잠들어 있는 오래된 물건 하나하나를 구경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아주 신기한 골동품을 찾지는 못했지만, 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종종 눈에 띄는 누군가의 오래된 카메라도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아마 지금 다시 그 시장을 간다면 고장난 듯한 구형 카메라 한 대 정도는 기념으로 구입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벼룩시장 구경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가 짐을 챙겨 나왔다. 항구로 가기 전에 카르푸에 들러 맥주 몇 병과 먹을 것 약간을 준비했다.


Barcelona에서 Roma 근처의 Civitavecchia까지 날 데려갈 Grimaldi Ferries 표는 유레일패스로 할인 받았다. 시간은 15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 같다. 별이 쏟아지는 지중해를 건너던 밤, 맥주 세 병과 담배 반갑이 함께였던 것 같다. 아무리 지중해라지만 겨울바다의 밤바람이 갑판에 매섭게 불어댔고, 덕분에 생각보다 멋없는, 한없이 초라하고 궁상 맞은 모습으로 담배를 피웠다. 그래도 맛있었고, 별은 반짝였다. 바다? 별과 타는 담배를 빼면 어둠이었다. 바르셀로나? 언젠가 항구는 불빛으로만 보였고, 점이 되었고, 어둠이 됐다.

FC 바르셀로나가 가슴에 새긴 것, 그것이 내 가슴에 새긴 것.
날 데려간 페리호가 지중해에 새긴 물결, 그 물결이 내 가슴에 새긴 추억.

20. Jan. 2007
in Barcelona

2009/08/28 - [Travel/Europe] - 바르셀로나.2 가우디의 바르셀로나인걸까?
2009/06/21 - [Travel/Europe] - 바르셀로나.1 지중해의 따스한 바람이 여유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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